::쌀 사랑 - 함양용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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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식생활사에서 주식과 부식이 분리된 시대는 삼국 정립 시대 훨씬 이전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특히 밥이주식이 된 이후 주식인 밥을 부식보다 훨씬 중히 여기는 풍습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밥이보약이다 ' 라고 할 정도로 우리조상들은 밥을 최상으로 삼았다. 밥은 말 할 것도 없이 쌀밥을 최상으로 치며, 다음으로 보리·조·수수 등의 잡곡이 밥의 재료가 되었다. 쌀이 밥의 주된 식품으로 등장한 것은 벼농사가 일반화된 삼국시대부터이다. 한국의 벼농사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이 있다.
1. 대륙을 거쳐 전래됐다고 하는 북방설
2. 중국의산둥반도에서 해로를 타고 한반도 중부에 전래됐다는 설
3. 중국 강남에서 남해안 지방을 기점으로전래됐다는 남방설
4. 북방설 및 남방설의 절충설
등이다.
우리나라의 벼농사의 시작은 종전가지는 대개B.C21세기 경으로 보았으나 1991년 김포군 동진면 계현리 일대의 토탄층에서 B.C2100년 대의 볍씨가 발견됐다. 또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의 토탄층에서 B.C2400년 대의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볍씨가 출토되어 우리나라 벼농사가 이미 신석기시대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신석기 시대에 시작되어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에 걸쳐 많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삼국시대에 들어 오면서 쌀의 생산량이 많아 져 쌀밥이 주식으로 중요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는 쌀 생산량의 절대량이 부족하여 쌀밥이 귀했다.

탄화미를 뒷받침하는 유물로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에서 기원전 6~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약 1900년전 전의 벼로 탄화미(炭火米)가 발견 되었고, 신라본기에 '남해왕 13년(16) 월 멸구의 피해로 백성이 굶주려 창고를 열어 구했다'는 기록과 고구려본기에 '태조 3년(55) 8월. 나라의 남쪽에 멸구가 곡식을 해쳤다' 는 기록들이 있다.

멸구는 벼식물에만 서식하며 지금도 매년 중국에서 기류를 타고 날아와 한국의 벼농사에 큰 피해를 주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월동이 안되는 곤충이므로 이들 의 피해가 민생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면 벼는 적어도 기원전 1세기 이전부터 많이 재배됐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대규모 저수지 축조 330년에는 논벼 재배를 위한 용수확보를 위해 대규모의 저수지인 벽골제를 축조한 것으로 보아 4세기경에는 남쪽에도 벼농사가 상당히 보편화됐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때의 벼농사 작부방식은 지력유지상으로나 호당경지규모로 보아 대체로 1년 또는 2년 만에 재배되는 휴한농법이 관행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는 농무도감, 전농사 등의 권농관을 두는 한편, 1363년(공민왕 12)에는 제학 백문보(白文寶)가 수차의 보급을 건의한 것으로 보면 벼 농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재배면적이 증가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1391년(고려 공양왕3년)의 논 면적은 51만여 ha였다.

한국은 조선 초기까지의 중국의《범승지서》·《제민요술》·《사시찬요》·《농상집요》등의 농서를 수집하거나 《사시찬요》·《농상집요》 등에서 보는 것 처럼 이를 국내에서 복간해 이용해 왔다. 따라서 고려말 이전의 한국의 벼농사가 어떻게 독자적으로 이루어져 왔는가 하는 기술적 내용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한국의 독자적인 벼재배법은 1429년(세종11)에 편찬된 《농사직설》종도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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